[독도이야기88] “율 브린너 할애비가 울릉도 나무 다 베어갔어.”

[독도이야기88] “율 브린너 할애비가 울릉도 나무 다 베어갔어.”

[독도이야기88] “율 브린너 할애비가 울릉도 나무 다 베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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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박사

1900년 울도군이 설치되어 울도 군수가 울릉도・죽도・독도를 관할한 후에도 일본인들의 침탈은 끊이지 않았다. 울도 군민들은 1901년 학교를 설립하고 일본인들의 도벌을 막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야욕 역시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1901년 말 일본은 일본인 단속을 구실로 일본경찰관을 울릉도에 파견하는 계획을 세운다. 1902년 3월에는 부산 일본영사관 소속 경부 1명과 순찰 3명 등 4명의 경찰관을 울릉도에 보내 일본경찰관주재소를 설치했다.

대한제국 정부도 1903년 4월 심흥택(沈興澤)을 군수로 임명하여 일본의 침탈에 맞서도록 했다. 울도 군수 심흥택은 울릉도에 부임한 후 일본인의 벌채를 일체 금지하도록 명령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벌목은 이미 십수 년의 관습이기 때문에 벌목 금지를 요구하는 것에는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런 일본의 울릉도 침탈에 대해 우려했던 것은 러시아다. 울릉도 삼림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러시아는 울릉도의 전략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3년 음력 7월에는 러시아 군함 1척이 울릉도에 정박하고 장교 1명이 27명의 병정을 인솔하여 상륙했다. 러시아 장교는 심흥택 군수에게 “일본인의 벌목과 일본 경찰관이 울릉도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 조선 정부의 어느 조약에 의거한 것인가”를 묻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조선 조정은 혼신의 힘으로 외적의 침탈에 맞섰지만 힘이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 모두 제국주의적 속셈을 감추지 않았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있던 일본과 러시아는 울릉도와 독도를 노골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만의 20세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홍순칠 대장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영화 ‘왕과 나’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배우 율 브린너의 할아버지가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획득, 500년 이상 된 나무들을 수없이 베어 러시아로 실어갔다는 내용이다. 그로 인해 울릉도 개척민들은 러시아 사람들의 행패에 시달려야 했으며, 일본 낭인배들의 노략질에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율 브린너는 191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압록강 목재벌채권을 미하이로비치 대공에게 팔아 거부를 챙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쥴리어스 이바노비치 브리너는 대한제국 말기에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의 수출입상사를 하고 있다가, 한국의 약 200만 에이커의 광활한 목재벌채권을 얻어낸 사람이라고 한다. 율 브린너 가문은 조선의 삼림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챙겼던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왜 직접 나무를 베어가지 않고 브린너라는 개인에게 삼림채벌권을 주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미 울릉도의 전략적 가치에 눈을 뜬 일본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가? 

당시 울릉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이 같은 의혹을 풀기 위해 최문형 교수가 쓴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과 한국>이란 책을 들춰 볼 필요가 있다. 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가 노린 첫 대상은 한반도였다. 하지만 영국과 일본의 날카로운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러시아는 영국과 일본의 이중 견제를 유발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따라서 민간인 사업가를 내세워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따내기로 했다. 정부가 아닌 한 민간인이 울릉도를 얻은 양 꾸며 영국과 일본의 의혹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삼국간섭 이후 크게 증강된 일본해군에 대항, 울릉도를 자국의 해군기지로 활용하려고도 했다. 결국 러시아는 1896년 주한 외교진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Y.I. Brynner)에게 압록강・두만강 삼림채벌권과 아울러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얻어주었다. 

이완용과 조병식이 1896년 8월28일자로 서명하고 이튿날 폴리아노프스키가 확인서명한 울릉도 임차계약서의 제16조는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조문은 조차기간을 20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잡아 놓은 후, 그 뒤에는 권한자인 브린너가 아무에게나 마음대로 양도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러시아 정부의 자유재량에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조심스러운 행동도 일본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울릉도의 삼림을 벌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울릉도의 경제적 가치와 아울러 전략적 가치까지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문형 교수는 일본의 전략적 구상에 대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러일전쟁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것이었다. 일본은 독도와 울릉도를 자국의 오끼(隱岐)와 중간거점으로 삼아 동해를 횡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려 한 것이다. 일본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결과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남하를 막는 요충으로서, 그리고 대마도 해전 직후에는 발틱함대의 패주를 막는 해전의 종결지로서 그 구실을 다한 것이다. 또한 92km에 불과한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해상거리는 언제나 두 섬을 동일한 전략해역에 속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역시 드러내놓고 울릉도와 독도를 탐낼 순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 한국병합의 야욕이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훗날 일본도 오끼섬에 거주하던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를 내세워 울릉도의 강치를 잡아들이게 함으로써 이 같은 국제적인 의혹을 피해가려고 했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에게 울릉도를 빌리게 한 것과 그 궤를 같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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