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섬을 비워두었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고려에 이은 조선 역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행사했다. 다만 조선은 고려와 달리 섬을 비워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형태인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택했다. 왜구의 침탈을 피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펴기 위해서였다.
태종 3년(1403년) 8월 왕이 “강원도 무릉도 거주민들에게 육지에 나오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은 감사(監司)의 품계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강원도 관찰사의 품계에 따라 무릉도(울릉도)의 사람들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태종 12년에는 울릉도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이 강원도 고성에 표류한 일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강원도 관찰사는 울릉도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후에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섬 안에 11가구에 6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섬에는 소나 말, 그리고 논이 없다. 하지만 콩 1두(斗)를 심으면 20~30석(石)이 생산되며, 보리 1석(石)에서 50여 석(石)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보다 전인 태종 7년에는 대마도 도주가 대마도 사람들의 울릉도 이주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논의를 벌였는데, 울릉도가 왜구의 근거지가 될 가능성 때문에 승인하지 않았다.
울릉도 이주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태종은 1416~1417년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채택했다. 태종이 공도정책을 채택한 것은 왜구가 울릉도를 침탈하고, 이로 인해 강원도까지 침탈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하고 군함 2척과 수행원을 주어 울릉도에 파견했다.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올 목적이었다. 당시 울릉도에는 방지용(方之用)이라는 사람이 15가구에 86명을 인솔하고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무사가 데리고 온 것은 겨우 3명뿐이었다. 안무사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2차례나 태풍을 만나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안무사 김인우는 왜 겨우 3명밖에 못 데리고 나왔을까? 그것은 울릉도 주민들이 떠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김인우에게 울릉도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인우가 돌아오자 조정은 대신회의를 열었다. 태종은 우의정 한상경에게 6조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우산도・무릉도에 대해 의논하도록 했다. 이 회의에서는 2가지 안건이 토의되었다. 울릉도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킬 것인가,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대신들은 울릉도에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에서 그것을 도와주자는 입장이었다. 곡식과 농기구를 공급해주어 백성들이 평안히 농사를 짓도록 해주고, 군대를 주둔시켜야 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주민들에게는 토산물을 바치도록 하면 국가적으로도 이익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당시 공조판서였던 황희는 한사코 반대했다. 황희는 울릉도 거주민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면서 세금을 토산물로 납부하도록 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주민들과 섬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이 군대를 싫어하여 오래 주둔시킬 수 없다는 황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이 확정되었다.
정부의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동해연안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울릉도로 들어갔다. 김인우는 훗날 군인 50명과 함께 다시 울릉도로 들어가 20여 명을 데리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선박 1척(46명)이 일본으로 표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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