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이사부 장군 우산국 정복하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의 일부다. 그런데 신라장군 이사부는 독도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을 노래 가사에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무슨 인연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사부 장군은 울릉도만을 복속시킨 것이 아니라, 독도를 포함하고 있는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학계에서는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한 서기 512년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고유의 영토가 되었다고 본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열전 이사부 조에는 “여름 6월에 우산국 귀복하다. 우산국은 강주의 정동(正東)에 있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이름하여 울릉도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정복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우산국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싸우지도 않고 점령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정말로 그랬을까? 삼국사기 열전 이사부 조에서는 하슬라(강릉) 군주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내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부가 나무 사자 계책을 쓴 것은 우산국을 정복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우산국을 정복하고 공물을 바치게 하라는 지증왕의 명령을 받은 이사부는 난감했다. 우산국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속에 있었고, 사람들은 거칠고 강했다. 공격하는 쪽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부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동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사부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었다. 며칠 뒤 전투는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우산국 사람들은 매우 완강했다. 이사부는 사자를 뱃전에 내세웠다. 우산국 사람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사자들이 뱃전에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사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에는 이 성난 사자를 풀어놓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몸을 찢어버리도록 하겠다. 어떻게 할 것이냐?”
그토록 사납던 우산국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괴물 앞에 기가 죽었다. 우산국의 왕은 당장 항복하고 공물을 헌상할 것을 약속했다. 우산국 사람들이 사자상을 보고 항복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삼한 시대에 유포된 샤머니즘의 우상이 사자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김원룡 교수는 우산국 사람들이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 때문에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
울릉도에는 지금도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는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남양 포구에 사자바위라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사자굴이 있으며 사자바위를 굽어보는 투구바위가 있다. 당시 던져진 나무 사자가 변하여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가 지금의 투구바위라고 전한다.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왕비 풍미녀의 시녀들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신라는 우산국을 정복한 후 어떻게 다스렸을까?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 의종 11년 기록에 ‘동해 가운데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옛날에 주현(州縣)을 두었고…’라는 문구가 전해온다.
옛날에 주현을 두었다는 말은 신라에서 우산국에 주현을 설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정부에서 직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편입한 우산국의 영토는 울릉도와 독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이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년)> 등에서 한결같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모두 우산국(于山國)의 땅’이라고 적고 있다. 우산국이 512년 신라에 귀속될 때 울릉도와 독도가 함께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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