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슬프다! 안용복 장군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니 저 동래사람 안용복(安龍福) 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
울릉도 도동 약수공원에 있는 안용복 장군을 기리는 충혼비에 새겨진 글이다. 이 충혼비는 국가로부터 외면당했지만, 백성에 의해 지켜진 독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안용복은 양반이 아니라 평민 출신 장군이다. 조정에서 임명한 장군이 아니라 백성들이 인정한 장군이다. 장보고가 삼국시대 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조선시대 바다의 영웅이다.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은 일본 막부로부터 두 차례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았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17세기 말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문헌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기록했다. 조선의 어느 장군도 이루지 못한 일을 혼자의 몸으로 해낸 것이다.
정조 때 편찬된 한국 역사의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에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네 땅이라고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의 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용복은 조선 왕조에 의해 관리를 사칭한 죄인으로 몰려 귀양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너무나 평범한 이 나라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의 출생에 대한 비밀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순흥 안씨라 알려져 있지만, 안씨 족보 어디에도 안용복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 돗토리 현의 18세기 역사가 오카지마의 <죽도고>라는 사료 내에 ‘오타니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라는 장에 안용복에 대한 내용이 있다.(월간중앙 WIN 1996년 5월 호)
여기에는 안용복의 출생을 추측할 만한 몇 가지 내용을 볼 수 있다. <죽도고>의 본문에는 ‘동래출신의 안핀샤(안용복)의 나이는 42세’라는 내용이 있다. 별도로 첨부된 안핀샤의 요패(호패)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안용복이 차고 있었다는 호패에는 양면에 각각 동래(東萊・출신지)와 경오(更午・호패 발급 연도로 추측)가 횡으로 쓰여 있다. 전면 동래 자 아래로 ‘000年 三十三/長四尺一寸/面鐵00生0無/主京居吳忠秋’라고 써 있다. 경오라는 글자 아래로는 ‘釜山佐川一里第十四虎三戶’라고 적혀있다.
경오년을 안용복이 호패를 발급받았던 해로 볼 때 그는 36세 때 1차 도항(1693년)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안용복은 21세인 1678년까지 부산 두모포 왜관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모포 왜관은 임진왜란 후 대마도 사람에게만 무역을 허락했다. 일본과 무역할 우리 측 상인은 동래상인들로 한정하였다. 즉 두모포 왜관은 대마도 사람과 동래상인이 무역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안용복이 일본인과 담판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일본말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용복은 2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일본 막부의 문서까지 받아오는 성과를 올렸다. 신용하 교수는 “막부의 결정은 죽도(울릉도・일본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울릉도를 죽도라 불렀다)와 송도(독도・일본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독도를 송도라 불렀다)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획기적인 문서로 받아들여진다.”고 평가한다.
안용복의 활약은 일본 최고 권력 기관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안용복 장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울릉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존재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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