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왕조실록의 안용복 사건

[독도이야기88] 왕조실록의 안용복 사건

[독도이야기88] 왕조실록의 안용복 사건

김성호 박사.jpg
김성호 박사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는 빈 섬으로 변해갔다. 약삭빠른 일본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기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특히 임진왜란과 그 직후에 조선왕조는 통치력이 크게 약해졌다. 울릉도・우산도(독도)를 돌볼 여력조차 없었고, 울릉도는 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게 된다. 울릉도에 몰래 들어간 조선인들은 왜구들에게 침입과 노략질을 당해야 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이 시기의 울릉도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울릉도는 일명 무릉으로 동해 가운데 있어 울진현과 상대하고 있다. 임진왜란 후 사람들이 들어가 본 일이 있으나, 역시 왜의 분탕질을 당하여 정착하지 못했다. 근자에 들으니 왜구가 자죽도(磁竹島)를 점거했다 하는데, 자죽도라고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이다.”

특히 울릉도를 눈독들이고 있던 이는 대마도주(對馬島主)였다. 대마도주는 1614년 6월 조선 동래부에 서계를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자죽도를 살펴보려고 하니, 길 안내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는 회유문을 주어 돌려보냈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1618년에 오타니(大谷)와 무라까와(村川)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라는 것을 주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2005년 일본 시마네 대학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 명예교수는 “당시 호키항이라는 항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봉건사회에서 막부가 섬을 나눠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이에 대해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일본인들은 막부의 도해면허와 무관하게 수시로 울릉도에 들어가서 벌목과 고기잡이를 자행한 것은 사실이다.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조선어부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안용복 사건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안용복 관련 건은 숙종실록 권30, 숙종 22년 9월조와 문휘고(文彙考), 통문관지(通文館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 31, 여지고(與地考) 동해 울릉도편에 언급되어 있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의 사람으로 동래 수군에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는 숙종 19년(1693년) 박어둔 등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인들의 계략에 의해 오끼도(隱岐島)로 납치되었다.

안용복은 오끼도주(隱岐島主)에게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에 들어왔는데 왜 잡아두느냐?”고 항의했다. 오끼도주는 안용복을 호키슈(伯耆州・지금의 돗토리현) 태수(太守)에게 이송했다. 그곳에서 안용복은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호키슈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용복을 에도(江湖)의 관백(幕府將軍)에게 보냈다.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호키슈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는 서계를 써주고 후하게 접대한 후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했다. 대마도에서는 대마도 사자 귤진중을 시켜서 조선으로 송환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안용복 사건을 역이용, 울릉도를 삼키려는 간계를 꾸몄다. 대마도주는 조선 측에 서찰을 보내 울릉도가 아니면서, 그와 비슷한 별개의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가 있는 것처럼 문구를 만들어 “이제 죽도에 조선 선박이 출어하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을 것이니 귀국도 엄격히 막아 달라”는 위조문서를 보내왔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죽도가 울릉도를 가리킨 것임은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건론이 채택된 것이다. 그래서 회답문에 ‘우리나라의 울릉도’란 문구를 넣어 보냈다. 대마도주가 보낸 사신은 회답문 속에 ‘우리나라의 울릉도’라는 표현을 빼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했으나 조선 조정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를 탈취하려는 대마도주의 집요한 획책을 막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안용복은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조선의 관리인 것처럼 차려입고 호키슈 태수의 집무실에서 태수와 마주 앉았다.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서계를 받았는데, 대마도주는 서계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였다. 내가 관백(幕府將軍)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고 따졌다.

일본 측에서는 국경을 넘어 울릉도로 들어갔던 일본인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했으며, 호키슈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국경을 넘는 자가 있거나 도주(대마도주)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며, 국서를 작성하고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무겁게 처벌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697년 일본에서는 울릉도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출입을 영구히 금지하겠다는 문서와 사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의 공로에 대한 평가보다는 관원을 사칭하고 국제문제를 일으킨 죄로 처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안용복은 영의정 남구만 등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구하고 귀양을 가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독도이야기.jpg

헤럴드 미디어 ( herald_news@daum.net )

※ 저작권자 ⓒ 헤럴드 미디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 Comments
한 달간 많이 본 기사
1
거제시가족센터, 슈퍼비전 및 교육 진행 거제시가족센터, 슈퍼비전 및 교육 진행
2
민기식 부시장 주재 첫 면·동장 회의 민기식 부시장 주재 첫 면·동장 회의
3
무더위 식힐 어린이 물놀이장 7월 8일 개장 무더위 식힐 어린이 물놀이장 7월 8일 개장
4
맞춤형 비료처방! 토양검정으로 시작하세요 맞춤형 비료처방! 토양검정으로 시작하세요
5
찾아가는 면·동 현안청취 간담회 시작 찾아가는 면·동 현안청취 간담회 시작
칼럼/기고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