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세 개의 봉우리 사이로 바다가 흐르고

독도는 삼봉도(三峰島)라 불렸던 적도 있었다. 성종 원년 영안도(永安道) 관찰사의 보고에 대해 임금이 내린 글에서 삼봉도가 등장한다. ‘삼봉도(三峰島)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배역도들이니 탐문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동해 가운데 삼봉도(三峰島)라는 섬이 있고, 영안도 사람들이 그 곳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봉도(三峰島)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었을까? 실재한다면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울릉도를 잘못 알고 말한 것은 아닐까?
조선 조정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성종 3년에는 박완원을 삼봉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하고 삼봉도 조사를 시작했다. 박완원은 4척의 배에 병력을 싣고 울진을 떠났으나 태풍을 만나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표류하던 박완원의 배는 5월 29일 새벽 무릉도를 발견하였으나 닻을 내리지 못하고 육지로 돌아오고 만다. 삼봉도에 대한 첫 조사 작업은 실패에 그쳤다.
하지만 이들의 실패로 인해 적어도 삼봉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릉도(울릉도)에 닻을 내리려 했으나 못하고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종 6년 5월에는 김한경 등이 육지에서 떠난 지 3일 만에 삼봉도에 도착했으나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들이 올린 보고서에 의하면 섬 안에 7~8명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성종은 다시 삼봉도를 조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영안도(오늘날 함경도) 관찰사 이극균의 지시에 따라 김자주 등이 9월 16일 출발하여 9월 25일 삼봉도에 도착한다. 이들이 본 섬의 형태는 북쪽에 3개의 암석이 서 있으며, 섬과 섬 사이에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들은 섬의 모습도 그려왔는데,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섬을 그려왔다.
김자주가 전하는 섬의 외형은 현재 독도와 매우 유사하다. 동도와 서도 그리고 삼형제바위, 탕건바위, 독립문바위, 가제바위 등으로 불려지는 36개의 암초들로 구성된 독도는 멀리서 보면 3개의 봉우리로 보인다. 그리고 동도와 서도, 삼형제 바위 사이는 폭 110~160m로 이 사이로 바닷물이 흐르고 있다.
김자주가 보고 온 섬이 독도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다른 섬일 가능성은 없는가? 트집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김자주가 보고 온 삼봉도는 현재의 독도를 지칭한 것이 아니고, 울릉도 연안에 있는 삼형제바위를 두고 말한 것이다.”
어렵게 꼬투리를 찾아낸 일본 측에 미안한 말이지만 울릉도에는 삼형제바위가 없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삼선암(三仙岩)이다. 삼선암은 울릉도 본토에서 수 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며, 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삼봉도가 울릉도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도 있다. <죽도사고(竹島史稿)>를 쓴 오오꾸마(大態良一)은 “성인봉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형상을 지칭한 것이 삼봉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게 생각해도 울릉도 성인봉에 올라 ‘세 봉우리 사이로 바닷물이 흐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해 바다에는 3개 정도의 섬이 있다. 울릉도와 죽서도(죽도), 그리고 독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섬과 섬 사이에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울릉도는 분명 아니다. 물론 저동 앞의 죽서도(죽도)도 아니다. 삼봉도로 추정할 수 있는 섬은 동해에서 독도 외에는 없다. 결국 삼봉도라는 이름은 독도의 외형을 보고 붙인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5)> 울진현조(중종26년 1531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 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도) 세 봉우리 위의 나무와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일본 군함 니다카호(新高)의 행동일지에는 ‘송도(울릉도?일본은 원래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 독도를 송도(마쓰시마)라 불렀으나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로 두 명칭을 바꿔 사용하였다) 동남쪽 망루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리앙쿠르도’라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완전한 삼봉의 형상을 하고 있다.
강치가 뛰놀던 섬 가지도(可支島)
강치는 울릉도 주민에게 가제 혹은 가지로 불려졌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강치는 독도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고 한다. ‘가지도’는 독도에 강치가 많이 살고 있는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지도라는 명칭은 <정조실록(권40 1794년)>에 처음 등장한다.
“갑인년 6월 26일에 가지도(可支島)에 가보니 가지어(可支漁) 네댓 마리가 놀라 뛰어나왔다. 그 생김새는 물소(水牛)를 닮았는데, 포수가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
오늘날에도 울릉도 사람들은 강치를 가제라 부른다. 이를 한문으로 음역하여 가지어라고 부른 듯하다. 또한 독도의 서도 북서쪽에는 가지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의용수비대가 이 바위 위에 수많은 강치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붙여준 이름이다. 독도는 한국에서 유일한 강치 서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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