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88] 일본의 영웅, 강치 도살자 나카이

독도에 그 많던 강치는 어디로 갔을까? 1980년대 소련에서 열린 세계자연보호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독도 강치 학살 누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일본 측 대표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독도의 강치를 한국 측 경비대원이 모조리 잡아 멸종상태에 놓였다”고 공격했던 것이다. 사연을 몰랐던 한국 측 학자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이 아닐 수 없었다. 독도의 강치 멸종은 바로 일본인들이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 강치 사냥의 역사는 일본의 독도 강탈과 맞물려 있다. 일본정부는 독도의 강치잡이 어업권을 독점하기 위해 교섭을 벌이던 나카이 이에사브로(中井養三郞)의 청원서를 이용,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불법적으로 편입한 독도의 어업권은 당연히 나카이에게로 돌아갔다.
본래 강치 사냥꾼이었던 나카이는 1890년부터 외국 영해에 나가 잠수기 어업에 종사한 기업적인 어업가였다. 1891~1892년에는 러시아령 부근에서 잠수기를 사용한 강치잡이에 종사했고, 1893년에는 조선의 경상도?전라도 연안에서 물개잡이에 열을 올렸다.
나카이는 1903년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해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그리고 아예 독도 어업권을 독점하고자 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알선을 받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독도 어업권을 청원했다. 그 역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해군 제독) 간부(肝付)는 “독도는 주인이 없는 땅이다. 어업 독점권을 얻으려면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신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라”고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9월 29일 나카이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서 자기에게 대부해 달라는 ‘리앙코(리앙쿠르?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일본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에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등장하게 된 것이며, 일본은 나카이의 문서를 근거로 독도를 불법적으로 강탈하게 된다.
정부와 함께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한 나카이는 자신이 원하던 독도의 어업권을 독점하고 무자비한 강치 살육전을 전개한다. 그의 강치 살육은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암컷은 그물로 잡고, 큰 것은 총으로 잡았다. 젖을 먹는 새끼는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카이는 ‘움직이는 것은 그저 죽인다. 돈이 되는 것은 살려둬서는 안된다’는 신조로 독도를 강치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고통을 독도의 강치들이 먼저 겪었던 것이다.
나카이는 이렇게 잡은 강치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는 그대로 바다에 버렸다. 1904년 한 해에만 몸길이 2.5m의 강치가 2,750마리나 도살되었다. 그 고기와 뼈는 어림잡아도 381톤으로 추정된다. 강치 사체가 썩은 냄새는 북동풍을 타고 울릉도에까지 날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썩은 고기는 바다에 떠서 수십km까지 떠돌아 바다를 온통 황색으로 물들였다. 일본 정부조차 나카이에게 경고를 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독도 강치 멸종의 책임은 나카이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구신을 얻고자하는 대한민국 자유당 권력자들의 빗나간 정력욕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56년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독도를 인계 받은 독도경비대는 고위층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다. 해구신 1개에 1계급 특진이라는 유혹, 거기다 300만 환이라는 거금까지.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인수한 박격포는 강치잡이에 동원됐고, 강치는 결국 이 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해양 전문가들은 독도의 강치들이 러시아 쿠릴열도로 떠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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