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서정적 사유, 박혜경 작가 초대전
해금강테마박물관·유경미술관(관장 경명자·유천업)은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해금강테마박물관 내 유경미술관 5관에서 유경미술관의 232회 초대전인 박혜경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박혜경 작가의 회화는 단순한 정물이나 풍경을 넘어선다. 화면에 등장하는 계단, 문, 빛, 기다림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를 사유하게 하는 은유적 장치다. 그는 계단을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성찰을 향한 여정으로, 문을 물리적 경계가 아닌 인식의 문턱으로, 빛을 단순한 채광이 아닌 삶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상징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작품 세계는 관람자에게 ‘지금 여기’의 시간을 멈추고 기다림 속에서 사유하게 만든다.
박 작가의 작품에는 언제나 ‘부재의 현존’이 깃들어 있다. 의자가 놓여 있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고, 창가의 화분은 빛을 받으며 자라지만 인간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은 화면 속에서 공기처럼 흐르며,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의 시간적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 기다림은 미래를 향한 지향이자 동시에 현재의 정지다. 박 작가는 이를 회화적 언어로 구현하며 일상의 풍경을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한다.
박혜경의 화면은 종종 초현실주의적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비현실적으로 배치된 사물, 과장된 색채, 그리고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듯한 장면들은 르네 마그리트나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잔향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의 회화는 서구 초현실주의와는 다른 궤적을 가진다. 그것은 한국적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짙은 보라색 잎사귀, 푸른빛이 감도는 실내, 햇살에 반짝이는 작은 꽃들은 단순한 색채적 실험이 아니라 한국인이 가진 정서적 감수성, 즉 ‘한(恨)’과 ‘여백의 미’를 동시에 담아낸다. 화면 속의 기다림은 서구적 ‘부재의 결핍’이라기보다 한국적 정서에서 비롯된 ‘채워지지 않음의 충만함’이다. 이는 동양적 시간관, 즉 순환적이고 유기적인 시간 인식과 연결되며, 박혜경의 작품을 한국 현대미술 속에 독자적인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현대 철학적 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박혜경의 작품은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과도 접점을 가진다. 문은 열려 있으나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은 채 이어진다. 의미는 끊임없이 유예되고, 기다림은 충족되지 않은 채 지속된다. 관람자는 화면 속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나 반드시 도달해야만 할 것 같은 세계를 경험한다.
또한 미셸 푸코의 ‘이질공간(heterotopia)’ 개념 역시 박 작가의 작업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그의 회화 속 실내 공간은 현실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벗어난 타자의 공간이다. 바다를 향해 열린 문,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된 계단, 상징적 식물과 동물들이 가득한 공간은 일상의 장소가 곧 사유의 무대임을 드러낸다.
박혜경의 회화는 한국 현대미술이 걸어온 흐름 속에서도 독특하다. 1970~80년대의 한국 단색화가 물질성과 반복을 통해 한국적 미학을 구축했다면, 박 작가는 서정성과 사유를 통해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의 화면은 단색화의 절제된 미학과는 다르지만, 한국적 사유와 정서를 회화에 담아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은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점차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중심에서 박혜경의 회화는 단순히 한국적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를 현대 철학적 사유와 결합시킨 독창적 언어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박혜경 작가의 작품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유하는 경험이고, 문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초대이며, 빛을 따라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그의 회화는 기다림을 통해 시간을 드러내고, 부재를 통해 현존을 사유하게 한다.
박혜경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이 단순히 서구적 흐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와 철학을 바탕으로 독자적 언어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미술적 성취를 넘어 한국적 사유가 세계 미술 담론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자 성찰이다.
전시에 관한 문의 사항 및 자세한 내용은 신서경 학예사(055-632-0670) 또는 해금강테마박물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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